∟ 그림자밟기 2022. 3. 13. 06:17

..... 우연으로도 충분했던..... .....

 

그 시절에는 선배가 없다.

고학번에 친구들이 있었으니 굳이 불편한 선배라는 존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, 

내 형편없는 대인관계로 단단한 동문 기반의 틈을 파고들 수도 없었을테고,

유일하게 기억하는 선배는 내가 그림자로 만들어 버렸기에.

 

도서관을 오가며 옆자리에 잠깐 시선을 두곤 했던 게 시작이었다.

둘 다 그리 성실한 편은 아니라서, 

그저 다녀간 흔적을 확인하는 정도였는데, 

그걸로도 충분했었다.

 

지나는 길에 그의 방 창문을 슬쩍 바라보곤 했다.

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.

차츰 길을 돌아서 그 앞을 지나는 날을 늘었고,

언제부터인지 몰라도,

불 꺼진 창에 잠시 스치는 시선을 두려고 그 길을 걷게 되었다.

 

그림자. 

옛 사람을 잊기 위한 비겁함이라는 자각이 있었다.

그래서 그는 내게 그저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.

우연으로도 충분했던.

그럼에도 잊기 어려운.

 

 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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